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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데몬] 산 - 잔재 殘在 본문
산, @MADIII_SAN
엘프는 오랜 시간 여행하는 종족이다. 언제나 그들이 돌아올 수 있는 고향을 마음에 품고서 각자의 두꺼운 이야기를 써나간다. 엘프 왕의 이야기는 먼지가 쌓일 만큼 오래되었다. 검은 마법사에 대적한 '영웅'이었던 자, 저주에서 깨어난 뒤 다시 맞서 싸운 자, 그 모든 이야기는 역사서에 남은 몇 줄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에게는 생사를 넘나든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생생한 기억이다. 에우렐의 바람은 부드럽다. 언제나 온기가 감도는 공기와 대지를 비추는 빛은 따스하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 엘프의 집이다. 에레브가 한곳에 머무른 적이 있다는 걸 알면 저 아이들은 놀랄 것이다. 황제의 섬이 움직이지 않는다니요?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많은 엘프가 전장에 나가진 않았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대항했지만, 왕은 군대를 이끌지 않았다. 그가 느꼈던 압도감, 절망, 그럼에도 모든 것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곁의 동료를 그들은 알지 못한다. 가끔은,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소란스러웠던 첫 만남, 함께 싸워나간 일, 프리드. 다시 만났을 때, 다시 합을 맞춰 전장에 뛰어들었을 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는 남지 않았다. 모두가 인간인 탓에 그들은 떠나갔다. '인간에게 너무 많은 정을 주지 마십시오.' 프리드를 향한 시선에 얻은 조언이었다. 너무 많은 마음을 주지 말아라, 그들은 너무 빨리 떠나가니까. 맞는 말이지만,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 기억도 없지 않았을 텐가. 나눌 수 없어 아쉬운 고난과 웃음이 서린 추억을 어찌, 보내는 일이 두려워 쌓지 못하겠는가.
에우렐은 변화가 느린 곳이다. 쉽고 빠르게 바뀌는 바깥과 달리, 에우렐은 느리고, 알아차리지 못할 속도로 변화한다. 문득 풍경이 바뀌었다는 걸 깨닫고, 그곳을 새로이 마음에 품는다. 에우렐은 그런 곳이다. 이 세계에서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엘프의 나라. 사랑해 마지않는 곳이나 왕은 과거를 꿈꾼다. "네게 지금 이 세상을 꼭 보여주고 싶어." 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면 나지막이 읊조린다. 문장은 노래가 되어 나무 사이로 흘러가고, 바람을 따라 세상으로 나아간다.
보고 있을 거라고 믿어. 내 이야기를 언제나 네가 듣는다고 믿어.
높은 나무에 걸터앉아 끝을 다해가는 태양을 바라본다. 다시 흐를 수 없는 곳을 바라보는 푸른 눈은 얕게 일렁이고, 한 올 한 올 빛 자락을 엮은 머리칼은 흔들리는 나뭇잎을 따라 향할 수 없는 곳을 바라며 흩날린다. 무성한 꽃이 사그라들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메르세데스는 엘리니아의 높은 나무를 좋아했다. 오르고, 오르고, 오르면 드높은 하늘과 어깨를 나란히 놓으며 세상의 숨을 들이쉴 수 있는 곳, 모든 게 평화로워 보이는 지상의 풍경, 멀리 뻗어 나간 바닷물의 흘러감을 사랑했다. 요정의 힘 아래 망가지지 않은 이곳에서 메르세데스는 불청객을 보았다. 과거 속의 인물, 역사 속 글자가 되어버린 자. 자연스럽게 무기로 손이 향하고, 한 걸음 물러나 시선을 날카롭게 만드는 자. 그날은 아무렇지 않았다. 시간이 틈을 메운 것인지, 평온한 숲 위로 흔들리는 건 바람뿐이었다. 머리칼이 붉고, 피부가 창백한 자. 이 땅에 남은 마지막 피가 붉지 않은 종족. 함께 남아있는 과거의 잔재이자 현재를 살아가야만 하는 또 다른 자.
"오랜만이네."
"오랜만입니다, 메르세데스."
"여긴 어쩐 일이지?"
"잠시 엘리니아에 들릴 일이 있었습니다.“
"이곳을 좋아하나 보군."
"조용한 곳이니까요."
나무와 바람의 소리, 주의를 기울이면 들리는 바다의 격한 운동과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이들의 노랫소리, 고요가 가득 메운 곳은 아니나, 조용한 곳이다. 발길이 닿지 않고 과거가 남겨진 조용한 공간이다. 그리움이 남은 자들이 찾기에는 아주 적당하다.
"지금은 어디서 지내는가?"
굳이 소식을 알려 하지 않았다. 모든 게 끝났을 즈음에도 적이 아닐 뿐이었다. 함께 추구하던 목적이 사라졌으니, 마주할 일도 대화를 나눌 일도 없었다. 과거에 남겨진 것 중 하나다. 오래됐지만 변하지 않은 관계, 그 순간에 멈춰 흐르지 않은 시간. 향수가 끼쳤다. 바람에 실려 훅, 몸속을 파고들어 발끝까지 퍼져나간다. 동일한 전장에 섰던 자, 바라던 바를 이루고 흩어져 각자의 삶에 치중한 자들. 순간을 공유했던 이들을 시간의 흐름에 맡기고 여전히 '현재'에 두 발을 딛고 선 자들. 그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처지에, 인간을 친구로 둔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할 처지에 놓였으니까. 동족도 없는 그가 이곳에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만나는 이마다 처음 그랬던 것처럼 그는 남겨지기만 했을 텐데. 함께 있던 고양이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저곳, 다니고 있습니다."
떠돌이라는 건가. 황금을 닮은 색과는 달리 그의 눈은 분노, 죄책감, 후회, 독기, 세상의 모든 부정을 끌어다 얽은 구렁이었다. 죽기 직전의, 죽지 못해 안달 나 산산이 조각나버리려는 안정이라곤 찾을 수 없는 시선이었다. 그에게 남은 건 고요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기억하는 자는 쉬지 않았을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 시선이 변했을 리가. 딱딱한 껍질로 끝나 속은 문드러진 게 짙은 눈에는 드러났었다. 그는 일관된 자가 되었다. 어느 쪽인지 알기 어려우나, 부드럽든 단단하든, 그는 변해 있다. 그에게 비치는 나 역시 변했으리라. 쉽게 목소리를 높이고 날로 가득했던 자와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과거를 공유하는 것이 아닌 과거에 멈춘 관계에서 상대를 본다. 추억과 눈앞에 놓인 선명한 흔적이 주는 차이, 우리는 그곳에서 묶인다.
"다음에 또 보지."
기약해야만 우리는 만날 것이다. 고요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향해 겨눈 화살을 놓기 직전이다. 그는 외줄에서 떨어지는 날에도 날개를 펴지 않을 것이고, 나는 과거를 향한 미련을 가진 자다.
처음 돌아오던 날에는 불만을 품었다. 왜 그가 남았느냐고. 두 번째 돌아오던 날은 보지 못할 이들을 꾸었다. 그가 내게 목도리를 건넨 날, 어쩌면 여행길에서 그를 마주쳤을 때, 엘나스의 눈 속에서 엷은 푸른색을 띤 목도리를 한 채, 몬스터를 잡던 그를 만났을 때, 그라도 남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화살을 놓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의 그는 꽤 괜찮은 청자이고, 그와 시간을 보내면 과거의 묵은 시계가 움직인다. 삐걱거리는 고통에 차 흐르던 내 시간이 현재에 발맞춰 째깍, 째깍 흐른다.
"다음에는 에우렐도 한번 방문하게."
"예?"
의문, 그는 에우렐을 방문한 적이 없다. 그가 지금껏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건 오지였다. 선택의 의도를 알아내려 하지 않는다. 그는 명백한 이유로 행동한다. 더는 그가 에우렐을 방문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의 검은 날개는 눈에 띄겠지만, 그가 보이지 않는 곳은 없다. 그는 감추지 않고, 정착하지 못한 채 사는 자다. 한 번쯤은, 그를 나무 아래서 만나고 싶었다. 꽃으로 무성한 나무 아래서, 에우렐의 바람을 맞는 그가 보고 싶었다. 단지 그가 유일하게 남은 자기에, 나는 그를 초대한 것일 뿐이다. 그는 누군가를 초대할 수 없으니, 내가 할 뿐이다.
"위치는 알고 있겠지?"
"네."
에우렐로 찾아올 거다. 분홍 꽃잎 아래 부드러운 바람이 그를 어루만지고, 잔잔한 온기가 감쌀 것이다. 결국, 나는 그를 기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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