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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아리

[팬텀아리] 람제 - 크리스마스 만찬

花緣 2019. 12. 25. 00:00

람제, @Ramze_cos_

 

치이익.

 

달군 기름에 두툼한 소고기를 올리자 금새 자극적인 소리와 함께 기름이 튀기기 시작했다. 한 쪽 면이 익기 전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있었으므로 야채를 손질하기로 결정했다. 찬물에 담가 놓았던 향초를 먹기 좋게 작은 크기로 자르고 탐스러운 방울 토마토를 장식 삼아 군데군데 올려놓자 프라이팬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냄새가 풍겨온다. 능숙하게 고기를 뒤집고 소금을 뿌린 뒤, 다시 몸을 돌려 샐러드 사이로 비네그레트 드레싱을 짜낸다.

 

화덕에서는 이미 매콤한 양념과 와인에 절였던 닭고기가 파이 시트를 뒤집어쓴 채 구워지고 있었고, 붉은 색의 짭짤한 스튜는 냄비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찬장 한 켠에서는 이미 만들어놓은 디저트들이 차갑게 보존되어 있다. 온 부엌에서 맛있는 향이 피어올라 한 발짝 들이기만 한다면 제 아무리 배부른 자라도 군침흘릴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풍경의 가운데에는, 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머리칼과 마치 반짝이는 자수정을 박아넣은 것처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자리했다.

 

" 으~음. "

 

팬텀이 나즈막히 신음을 흘리더니 조심스레 접시에 스테이크를 올려놓았다.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양파가 아직 열기를 잃지 않고 얌전히 그것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때 맞추어 알맞은 소리와 함께 닭고기 파이가 완성되었다고 신호가 왔다. 그는 곧장 두꺼운 천 장갑을 끼고 파이를 꺼내었다.

메인인 스테이크를 중심으로 닭고기 파이와 토마토 스튜, 거기다 샐러드까지 올려놓자 금새 풍성한 식탁이 되었다. 기름과 꿀을 바르고 구운 빵, 두꺼운 감자튀김, 후추를 뿌린 세이보리 수프, 마지막으로 향초를 넣어 숙성시킨 와인까지.

 

완벽해.

 

팬텀이 식탁 곳곳을 작싱한 양초에 불을 붙이며 생각했다. 은방울 꽃 모양의 램프에서는 은은한 베이지색 불빛이 내려오며 연한 장밋빛 식탁보를 밝혀주었다. 한 켠에 놓은 성탄꽃 다발 또한 분위기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맛있는 음식과 향과 색이 어우러진 이 광경은 누가 봐도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크리스마스의 만찬이었다.

 

팬텀에게 있어선 '정성들여 만든 요리'가 사랑하는 연인과 첫 번째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인 만큼 그녀에게 무얼 해줄까 깊게 고민하던 중 나온 해결책이었다. 상대가 메이플 월드의 황제인데 물질적인 것이 무어가 필요하겠는가. 더군다나 그의 연인은 황금을 그리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팬텀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요리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디. 프리드의 조안으로 선물을 맛있는 한 끼 식사로 정했다지만 그는 요리의 '요'도 해본 적이 없었다. 평생 남이 해준 음식만을 먹어왔기 때문이다. 팬텀은 그 사실을 깨달은 즉시 동료인 루미너스에게 자존심이고 뭐고 부탁했다. (메르세데스는 애초부터 제외였다.)

한 달 동안 먼저 말 걸지 않고 시비걸지 않고 하는 말에 얌전히 따른다는 조건 하에 팬텀은 결국 루미너스에게서 요리 선정과 레시피를 도움받을 수 있었고, 그는 거기다 (툴툴거리긴 했지만) 시식까지 해주었다.

 

' 완전 무서웠지, 샌님. '

 

팬텀이 찌뿌둥한 허리를 펴며 생각했다. 평소에는 그저 시니컬하게 있을 뿐인 그가 실패한 요리를 한 입 먹자마자 곧바로 이클립스로 돌변하는 모습이라니. 그래도 뭐, 그 덕에 지금 이렇게 성공은 했지만. 좋은게 좋은 가지. 뻐근한 고개를 한 두번 기울이자 한 켠에 놓인 오래된 괘종시계에서 7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댕, 하고 느리게 울렸다. 그것은 곧 있으면 그의 연인이 도착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팬텀은 조용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현관 앞을 서성거렸다. 그러고 있기를 1분 간, 그는 문 밖에서 웅성거리는 몇 개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왔다. '

 

그는 뛰어난 괴도답게 그 와중에서도 원하는 목소리를 정확히 포착했다. 팬텀이 부엌 한 쪽에 몸을 숨기는 동안 대화 소리가 조금씩 커져갔다.

 

" 거기 조심해, 아리아. 계단 있어. "

" 이… 이렇게 올라가면 되나요? "

" 응, 옳지. … …자, 절대 풀지마. 들어가서 꼭 열 걸음 걷고 난 뒤에 안대 풀어야해? "

" 네. 고마워요. 아란, 메르세데스. "

" 우리야 받을 게 많으니까 고마워하지 말고 어서 가봐. "

 

그리고 문이 열리며 찬 공기가 훅 들어왔다. 아리아를 데려다 준 아란과 메르세데스가 조용히 현관문을 닫았다. 숨어있던 팬텀은 숨을 죽이고 아리아가 열 걸음을 걷고, 조심스레 안대를 풀어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얀색의 겨울 드레스를 입고 하늘색 케이프로 어깨를 감싼 모습은 누가 보아도 눈의 여왕 그 자체였다. 그녀가 있는 발자리에만 희미하게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아름다웠지만 오늘이야말로 절정이다.

 

아리아는 안대를 푼 뒤 잠시 큰 눈을 깜빡였다. 무엇을 기대했을진 몰라도 평범한 가정집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았가. 그러나 그것도 잠깐, 아리아는 어렵지 않게 만찬이 차려진 식탁을 찾아내었고, 금새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 와아…! "

 

귀엽다, 귀여워. 너무 귀여워! 심장에 직격탄을 맞은 팬텀이 속으로 연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는 연인의 사랑스러움에 몸부림을 치는 것보다 해야할 일을 마저 마무리짓기 위해 움직였다.

 

 

문득,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아리아를 부드럽게 그러안았다. 잠시 몸을 굳힌 그녀는 비명을 지르기보다 이 포옹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먼저 생각해냈다. 메이플 월드에서 황제의 옥체를 겁도 없이 껴안을 수 있는 자는 지금 상황에선 딱 한 명 밖에 없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아리아는 짧게, 하지만 즐거움을 가득 담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속삭였다.

 

" 팬텀. "

" 아리아. "

 

한 쪽 볼에 온기가 가득 담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 이거, 전부 팬텀이 만든 거예요? "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몸을 돌리고 그를 바라보자 황제의 연인은 쑥스럽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리아가 미소지었다.

 

식탁 위에는 숨을 한 번만 들이켜도 군침이 가득 도는 음식들이 채워져 있었다. 스테이크, 스튜, 샐러드, 고기 파이… 그 중에서도 화룡점정은 누가 뭐래도 가운데 놓인 커다란 초콜릿 케이크였다. 그 위에는 금빛 크림으로 '메리 크리스마스, 아리아' 라 쓰여 있었다.

 

그것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아리아가 팬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 정말 고마워요, 팬텀. "

" 크리스마스잖아. "

 

솜씨 좀 내봤지, 뒤이은 말과 가벼운 키스에 아리아는 또다시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메이플 월드 제일 가는 괴도이자 영웅이 자신을 위해 손수 고기를 굽고 케이크를 만들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로 이보다 더 확실한게 어디 있겠는가.

 

팬텀이 허리를 숙인 뒤 아리아의 손등에 대고 짧게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장난스레 윙크하며 올려다보았다.

 

" 그럼. 어서 가시죠, 아리따운 숙녀 분. "

" 좋아요. 잘 부탁해요, 멋진 신사님. "

 

 

창 밖에서는 손톱만한 크기였던 눈송이가 점점 커지며 느리게 흩날리고 있었다. 행복한 연인의 집 주변이 서서히 하얗게 물들어갔다.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화이트 크리스마스. 평화로운 적막 사이로 울려퍼지는 것은 즐거운 웃음 소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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