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영패파] 달꽃 - 오랜만에 크리스마스
달꽃, @HYPF_maple1
패파는 눈을 딱 감고 잠들고 싶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계획해 놓은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벌써 크리스마스였다. 이대로 뻗어서 24시간 양껏 자고 싶은데 한 달 가량 못 본 호영이랑 만나기로 한 시간이 4시간 후였다. 원래라면 어제 도착해 충분히 잠을 잤을 텐데 막판에 꼬인 시간표 때문에 이제야 도착한 집은 한 달을 비운 것이 무색하게 익숙했다. 지금 잠들면 백퍼센트 못 일어날 텐데. 그렇지만 패파는 눈이 너무 무거웠다. 4시간 후 이 상태로 만난다고 해서 뭘 그렇게 할 수 있나 싶어졌다. 당분간 해외 나갈 일도 없는데 너무 피곤하니까 한숨 자고 만나자고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서 패파는 소파도 아니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온 관절이 흐물거려서 금방 잠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몽롱함이었다. 감기려는 눈을 겨우겨우 뜨고 정신줄 대신 폰을 들었다. [ 호영이 ] 투박하기 그지없지만 성 떼고 이름을 저장해본 적 없는 패파는 최근 기록에 간간히 섞여 있는 호영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루.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이 자장가보다 더 아득하게 들려서 깜빡 넘어가려던 꿈 세계에서 겨우 정신을 붙들었다.
- …여보세요.
패파는 언제 받았는지 모를 호영의 목소리가 잠기운에 눌려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졸린 패파는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만 생각날 뿐이었다. 호영아. 응.. 나 지금 집 들어 왔어. ..응. 그래서 나 좀 이따 못 만날 것 같아. 패파가 기억하는 건 여기까지였다. 할 말이 끝났다 생각하니 호영이 무슨 생각을 할지 고민해볼 여력도 없이 그대로 잠이 들었다. 힘없이 바닥으로 미끄러진 폰에서 패파, 패파?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해줄 패파는 완벽하게 꿈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로부터 2시간 후. 한 달 동안 패파를 못 본 호영은 이른 새벽 못 만난다는 통보를 하고 뻗어버린 패파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나갈 준비를 멀끔히 마친 상태였다. 그렇다고 호영이가 패파의 말을 진짜 못 들은 건 아니었는데 원래 입으려 했던 옷과 전혀 다른 후드 티와 추리닝바지가 그것을 증명했다. 어째 기분이 쎄하다 했어. 두 시간 전 호영은 비행기가 늦게 출발한단 연락을 받은 후 야금야금 줄여갔던 기대를 아낌없이 날려버리는 전화를 듣고 잠이 깨 버렸다. 아무리 긴 시간 연애를 했어도 한 달이나 못 봤으면 보고 싶은 게 당연한데 평일 사이에 낀 올해 마지막 공휴일을 이렇게 날릴 생각을 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자는 모습이라도 들여다봐야 성에 찰 것 같아 집 데이트로 방향을 바꾼 호영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닌 패파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게 집을 합치자니까... 결혼을 안 할 것도 아니고 양쪽 집 다 알겠다 그냥 같이 살자고 이야기했는데 패파는 거절했다. 결혼하기 전에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 된다며 당장은 자신을 내버려두란다. 그래서 내버려 뒀더니 누가 패스파인더 아니랄까봐 진짜 하고 싶은 걸 다했다. 이번 것도 벼르고 벼르던 유적지 여행을 한 달이나 갔다 온 거였다.
패파... 아무리 너가 프리랜서로 일한다지만.. 한 달은 정말 길어... 가기 전에 붙잡던 말은 씨알도 안 먹힐 말이었지만 호영은 제가 아쉬워서 어쩔 수 없었다. 한 달 너무 길지 않아? 중간에 한번 오면 안 돼? 그렇게 묻다가 마지막엔 나 안 보고 싶을 것 같냐 물으니 진하게 뽀뽀만 해주고 끝났다.
그렇게 지난 한 달을 회상한 호영은 이미 다 아는 번호를 누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고스란히 쌓여 있는 한 달 치 캐리어를 보고 정리해야 하나 잠깐 고민이 됐지만 그건 곧 하게 될 테니 얼굴을 먼저 봐야겠다. 그리고 발견한 건 어디 가지도 않고 고대로 거실 한가운데 누워있는 패파였다. 누워있는 패파를 본 호영은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피곤했는지 이불은커녕 베개도 없었고 입고 들어온 옷 그대로 뻗어 있는 집은 보일러도 못 켰는지 서늘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이 꺼진 보일러 버튼을 누른 호영은 방 안에 들어가 베개와 이불을 들고 나왔다.
패파.. 호영은 이불과 베개를 내려놓고 롱패딩을 한쪽에 벗어 두었다. 그리곤 패파의 옆에 주저앉았는데 완전히 기절한 패파는 깰 것 같지 않았다. 주섬주섬 너부러진 폰도 저 멀리 보내고 가져온 베개를 머리 밑으로 괴어주었다. 어떻게 한 달 동안 떨어져 있으면서 나 보고 싶단 말도 안 하지.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눈앞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지금은 아침 8시.. 두 시간 전에 전화가 왔으니까 점심까진 어떻게 해도 안 일어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한층 더 편해진 마음으로 갖은 기대를 비워낼 수 있었다.
진짜 나 아니면 누구랑 같이 살려 그래. 그렇게 제 칭찬으로 약간의 서운함까지 털어낸 호영은 불편할 것 같은 긴 외투를 벗겼다. 아직 추워서 반사적으로 더 몸을 마는 패파를 보며 가져온 이불을 덮어준 호영은 그 옆으로 자리를 잡고 누웠다. 자고 일어나기만 해봐. 붙잡고 안 놔줘야겠단 생각을 한 호영은 베개 사이로 팔을 밀어 넣으며 패파를 껴안았다. 그래도 사람 체온만큼 따뜻한 게 없지. 오랜만에 안고 누워있으니 스며드는 체온을 따라 슬금슬금 졸음이 몰려왔다. 눈 뜨면 몇 시가 될까. 알람 맞춰 두고 잘까. 그러나 이미 자세를 잡은 호영은 새벽부터 깨서 맞은 찬바람에 노곤함이 더해져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같이 자고 일어나지 뭐.. 아직 공휴일의 시간은 많이 남았고 크리스마스 기분은 저녁에 내도 충분했다. 그래서 눈을 감아 내린 호영은 고른 숨을 내뱉다 잠에 빠졌다.
호영의 예상과 달리 눈을 먼저 뜬 건 패파였다. 찬 바닥에 드러누워 자서 아픈 것처럼 일어나도 제 책임이라 생각했는데 눈을 뜨니 보이는 건 덩그러니 빈 거실풍경이 아니라 익숙한 후드 티였다. 기어코 왔네. 패파는 웃음을 터뜨리며 자고 있는 호영을 봤다. 몇 시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자신보다 더 열심히 자고 있는 호영은 진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긴 했다. 하암. 다 풀린 피로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잠을 자고 나니 개운했다. 호영이 이불이며 베개를 챙겨와 따뜻하게 해줘서 그럴 거다. 호영아. 패파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 위로 손을 감싸 쥐었다. 슥슥 맨손으로 매만지는 감촉이 퍽 좋았다. 호영아. 크리스마스라고 신나서 약속 잡았는데 새벽에 전화 받고 실망했을 게 뻔하다. 그래서 피곤은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가기 전에 호영의 기분에 맞춰줄 생각이었다. 백호영ㅡ 패파는 목소리에 힘을 실으니 스르륵 말려 올라가는 눈꺼풀 아래로 잠기운 가득한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언제 왔어. 나긋한 목소리에 잠을 깨려고 눈을 깜빡인 호영은 체온으로 데워진 공간을 좁히며 몸을 붙였다. 전화 받고 조금 이따가. 도로 눈을 감은 호영이 답했다. 엄청 일찍 왔네. 패파는 거실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2시 반.. 일찍 일어난 것도 아니었구나..
어제 안 잤어?
아니 잤어.
근데 또 잤어?
응. 너가 안 깰 것 같아서 마음 놓고 잤어.
나갔다온 해외가 해외인지라 전화를 거의 못 했던 패파는 새삼 호영의 목소리가 편하게 들렸다. 오늘 하고 싶은 거 있지. 확신에 찬 말은 하고 싶은 걸 말해보란 어조였다. 그것을 듣던 호영은 눈을 꿈뻑이다 패파를 보았다. 이미 늦었어. 왜. 뭐가 하고 싶었는데. ...몰라 이미 늦었어. 패파는 답도 더 듣지 않고 자신을 꽉 안는 호영에 팔을 둘렀다. 그래도 대화를 해야 하니 파묻힌 얼굴만 젖혀 호영을 봤다. 말해봐. 들어준다니까. 달래듯 타이르니 잠잠하게 멈춰있던 호영이 입을 열었다.
데이트. ...그러니까 무슨 데이트. ....그냥.. 나가서 밥 먹고.. 응. ...카페도 가고.. 응. ...뭐 그런 거. 진짜 한 달이 어지간히 길었나보다. 심심했어? 패파는 큰 의도 없이 툭 던져 물었다. 그것에 게슴츠레 눈을 뜬 호영은 입술을 삐죽 세워 올렸다. 아니 그런 의도는 아니고.. 패파는 다다다다다 쏟아져 나올 것 같은 투정을 직감하며 호영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 안 보고 싶었지. 아니나 다를까 삐쭉 솟은 입술로 물어오는데 패파는 웃으며 답했다. 왜 안 보고 싶어. 호영은 그게 진짜든 아니든 제게 맞춰주려는 게 보이는 패파에 서운함을 걷어내었다.
언제 나가.
지금 나갈까? 씻고 나와?
응. 근데 조금만 더 이러고 있다가.
호영은 오랜만에 보는 패파가 좋아서 팔베개로 내어준 팔 대신 반대 손으로 손을 잡았다. 만지작만지작. 애정이 가득한 손장난에 마음이 편해지면서도 덩달아 잠이 오는 것 같아 눈을 크게 한번 떠본 패파는 그것까지 잠자코 쳐다보는 호영에게 피식 웃었다. 이제 한 달 동안 갈 데는 없어. 호영은 그 말을 믿어도 되는지 재보는 눈치였지만 패파는 진심이었다. 어지간한 데는 다 돌아봤고 간다 해도 한달 동안 비울 여건은 안 될 거다 이제. 이것도 다 아직은 나이가 어리니까 가능한 거지 뭐. 패파는 앞자리가 3으로 바뀐 이후 막연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이면 별 거 안 해도 신나고 그랬는데 이젠 크리스마스 당일조차 휴일로 밖에 안 느껴지는 걸 보면 세월이라는 게 무시할 수가 없다.
호영아. 응. 나가서 트리 조그만 거 사올까. ..트리? 응. ...트리가 하고 싶어? 패파는 평소 자신이 할 것 같지 않은 말을 듣고 눈을 깜빡이는 호영에게 응, 하고 답했다. 집 좀 꾸며 볼까봐. 호영은 다시 눈을 깜빡였다. 패파가 하고 싶다니 하긴 할 건데.... 그렇게 흘러가는 담백한 생각과 달리 패파를 보고 있는 호영의 광대는 방싯하게 올라갔다. 그럼 차로 마트 갈까. ..너 차 가지고 왔어? 아니 너 차 있잖아. 패파는 과장을 덧붙여 코앞에 있는 호영의 집을 떠올리며 끄덕였다. 그래 좋아. 그럼 너가 요리해. 오랜만에 호영이가 한 요리나 먹어보자 싶어 말하니 광대가 한껏 올라간 호영은 응, 하고 답했다. 방향도 잡혔겠다 더 누워있으면 시간만 갈 것 같아 몸을 일으킨 패파는 그제야 훤히 드러난 호영의 옷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데이트 가자며.
응.
근데 추리닝 입고 왔어?
응. 솔직히 오늘 못 나갈 줄 알았어.
뼈가 있는 말인데 말랑말랑하게만 들리는 건 호영의 기분이 좋기 때문이었다. 한 달 만에 보는 약속인데 못 나가겠단 말에 들었을 서운함도 다 내려놓고 온 그 마음이 참 고맙고 좋다. 그래도 마트 나가긴 좋은 복장이야. 덧붙여 들려오는 말에 킥킥 웃은 패파는 알겠다며 상체를 일으킨 호영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금방 씻고 나올게. 그러면서 쪽 입술 위로 가벼운 입맞춤을 하니 호영의 얼굴이 홧홧해졌다. 슬금슬금 패파가 가는 대로 몸을 일으켜 따라가던 호영은 아직도 현관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캐리어를 보았다.
짐 치워놓고 있을까?
어.... 그래. 옷 다 빨래 할 거야.
응. 호영은 샤워가운을 챙겨서 욕실로 들어가는 걸 보며 현관에 쌓여있는 캐리어로 향했다. 완전 커다란 캐리어 하나랑 작은 캐리어 하나를 거실 초입까지 가져와 눕힌 호영은 방금 전 스쳤던 입술을 슬쩍 매만졌다. 불가항력적으로 올라가는 입가에 딸깍, 캐리어를 연 호영은 물소리를 배경 삼아 빨래 돌릴 짐들을 빼내었다.
마트를 다녀온 둘의 양손엔 짐이 가득 들려있었다. 뭐 먹고싶냐고 물어보는 호영에게 아무거나 하고 답했더니 속 풀어지는 찌개를 끓여준단다. 해외에 한 달이나 갔다 와서 그런지 찌개 하니 군침이 돈다. 그럼 나 김치찌개. 참치 넣고 끓여줘. 그렇게 정해진 메뉴는 어려울 게 없었고 참치에 반찬거리만 몇 개 더 산 호영은 간식을 잔뜩 골랐다. 오늘 집에 갈 생각이 없나봐? 패파는 수북하게 쌓인 군것질거리를 보며 물었고 호영은 웃기만 할뿐 아니란 답을 안 했다. 그렇게 먹을 거 한 박스를 사다 실은 건 호영이 들고 오는 걸로도 충분했을 텐데 패파의 손도 비어있지 못했다. 나가기 전 계획은 분명 조그만 트리로 기분 내는 거였는데 밖에서 데이트를 안 하니 예상보다 돈이 여유로워진 호영이 신났기 때문이다.
패파. 응. 우리 한 2월까지 트리 두자. 그 트리 두는 곳이 너네 집이 아니고 우리 집인데? 그렇게 말하려다 상처 받을 것 같아서 그래, 하고 답했다. 괜히 장난치려다 빙빙 돌아가긴 싫어서 그러라고 하니 호영은 아예 온 집안을 크리스마스로 꾸밀 것처럼 장식들을 샀다. 트리는 기본이고 각종 인테리어 소품들을 집어 들어서 파티하고 싶어? 하고 물어야 할 정도였다. 뭐 어쨌든 오랜 만에 보는 거니까. 호영이 신난 것도 있지만 덕분에 크리스마스 기분이 날 것 같아 옛날 기분이 난 패파도 흥이 났다.
밥부터 할까?
호영은 나가기 전에 앉혀놓은 밥이 다 된 걸 보며 찌개를 끓일 준비를 했다. 바리바리 사들고 온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거실로 몰아두던 패파는 응, 하고 답을 하며 팔을 걷어붙였다. 포장만 다 뜯어놓자. 그렇게 평온한 침묵 속에 각자 할 일을 했다. 포장만 벗기면 끝나는 패파는 분리수거를 마치고 호영을 보았다. 요리를 잘 하는 호영은 금방 찌개냄새가 나게끔 만들어놨는데 간을 보더니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 훤히 붙어있는 부엌으로 간 패파가 호영의 옆에 섰다. 응, 근데 좀 더 끓여야 될 것 같아. 한입 줘봐. 냄새가 좋아서 부탁하자 숟가락을 뜬 호영이 내밀었다. 호로록, 뜨거울지도 모르는 국물을 마시니 진짜 한국에 온 느낌이 났다. 시원하다. 패파의 맛 평가에 키득키득 웃은 호영은 숟가락을 옆으로 내려두며 패파를 껴안았다. 반찬은 뭐하게? 김치찌개야 금방 끓을 거고. 트리 장식을 풀어놓고 오니 얼른 장식하고 싶은 패파는 금방 먹자는 뜻으로 물었다. 그 뉘앙스를 어련히 읽은 호영은 패파의 어깨 너머로 턱을 빼 괴었다. 계란말이? 어, 좋아. 패파.. 응. 패파는 오랜만에 보는 자신에게 한껏 치대는 호영을 마주 안았다.
나 오늘 자고 가도 돼?
이미 그러려고 왔잖아.
아닌데. 나 내일도 일 가는데.
아 맞다 내일 휴일 아니지. 패파는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럼 집 가야하는 거 아냐? 너 추리닝이 다잖아. ...내일 아침에 나 집 데려다 줘. 출근 날 평소 일정보다 더 일찍 일어나야 하는 건 여간 힘든 게 아닌데 정말 어지간히 붙어있고 싶나보다. 자신이야 손해 볼 게 없어서 알겠어, 하고 답하니 히히덕거린 호영이 터뜨릴 것처럼 꽉 한번 안아왔다.
그렇게 호영이 차려놓은 밥을 양껏 먹은 패파는 2차로 몰려오는 나른함에 소파 위로 털썩 앉았다. 눈앞에 있는 트리와 장식들을 꾸며야하는데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호영도 패파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여서 그 옆에 앉으니 스르르 기대온 머리가 어깨 위로 닿았다. 꾸물꾸물 팔을 움직여 기대기 편하게 뒤로 둘렀다. 그 애정 어린 몸짓이 좋아서 피식 웃은 패파가 고개를 들었다. 호영아. 응. 메리 크리스마스. 나직하게 들려오는 인사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라 호영은 조금 늦게 반응했다. 사르륵 올라간 입매가 시원시원해서 덩달아 입가를 걷어 올린 패파가 손을 뻗었다. 만지작만지작. 앞머리를 쓰다듬다 뺨을 감싸 쥐었다.
트리 저렇게 해놓는 거 되게 느낌 있지 않아?
호영은 포장만 풀린 채 난잡하게 늘어져있는 거실을 봤던 제 눈이 잘못된 건가 싶어 힐끔였다. 패파는 그걸 보고 킥킥 웃었는데 호영은 다시 패파를 보며 답했다. 피곤하면 피곤하다고 해. 응 나 피곤해. 패파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긴 했지만 그만큼 호영을 신경 쓰기도 했다. 한국 온 이후 다섯 걸음쯤 물러나준 것 같은 호영을 곱씹으며 트리는 꼭 만들자고 생각하고 있긴 하다. 근데 호영아. 응. 패파는 서운한 기미가 드러날 것도 같은 얼굴을 매만졌다. 너랑 있으니까 좋다. 그래서 평소 잘 못해줬던 낯부끄러운 말을 했다. 호영은 패파를 보다 말고 졌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키득키득. 패파는 매만지던 호영의 뺨을 끌고 왔다. 쪽. 아무도 양치를 안 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나눈 뽀뽀는 달달하기만 하다.
주말에 아무데도 안 보내 줄 거야.
응, 나 일정 없어.
패파는 호영의 선전포고를 무난하게 받아주었다. 오랜만에 붙어있지 뭐. 그런 마음으로 답을 하니 뽀뽀하느라 제 쪽으로 쏠렸던 무게중심을 반대로 끌고 간 호영에게 기대어졌다. 패파. 응. 그럼 트리는 주말에 만들자. 패파는 기어코 한발 더 물러나주는 호영에 쿡쿡 웃었다.
호영아.
왜.
너 진짜 귀여워.
호영은 뭐라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패파의 얼굴이 진짜 사랑스럽단 얼굴이어서 아무런 말도 못했다. 잘 거야? 민망해서 말을 돌리는 호영은 정말로 귀여웠다. 아니. 쿡쿡 웃은 패파는 호영이 사온 간식을 떠올리다 먹고 싶은 게 생각났다. 홈런볼 먹을까. 홈런볼? 응. 단거 먹고 싶어. 그러면서 몸을 일으키니 금방 따라 일어선 호영은 간식 먹을 준비를 했다. 그냥 까서 먹으면 되는데 그릇을 꺼내는 걸 보니 크리스마스가 그냥 가는 게 엄청 아쉽나보다. 기꺼이 맞춰줄 의향으로 잘 쓰던 커플 컵을 꺼낸 패파는 탄산음료를 꺼냈다.
내일 아침 몇 시에 나가면 돼? 음... 7시 반? 그럼 나 7시 반에 눈 떠도 돼? 응. 너는 몇 시에 일어날 건데. 나? 한... 6시 반? 응. 내일 일정까지 간단하게 정리를 한 패파는 감자 칩도 뜯어 올린 호영과 나란히 소파 아래에 자리 잡고 앉았다. 트리를 한쪽으로 밀어둔 호영은 쭉 들이켠 음료에 탄산이 시원해서 생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주말에 데이트 뭐할까.
가볍게 물어오는 패파의 목소리마저 심장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데 충분해서 광대가 올라간다. 오랜만에 경복궁 갈까? 패파는 호영이 꽤 좋아하는 데이트 코스를 떠올리며 물었다. 주변에 인사동도 그렇고 작은 박물관이나 전시장이 많아서 자신도 퍽 좋아하는 코스였다. 응. 웃음이 숨겨지지 않는 목소리와 표정을 보며 웃은 패파는 그래, 하고 답했다. 패파. 응. 메리 크리스마스. 뭐 하나 제대로 이어지는 맥락의 대화가 없었지만 두서없이 마음대로 섞이는 말들이 편하다. 패파는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는 이런 대화들이 오랜만에 만나서 더 새삼스럽고 좋았다. 해외에서 만난 사람 중에 언어가 아니라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이 꽤 있어서 더 그랬다. 그만큼 오래 같이 함께 한 호영이 변함없는 건 더더 좋았고.
이거 먹고 트리 만들자.
저절로 희미해진 피곤함에 냉큼 말을 했다. 그것에 자신을 물끄러미 보며 현실적으로 믿어도 되나 보던 호영은 그래, 하고 말이 바뀌기 전에 못을 박듯 답했다. 주말에 경복궁 가면 트리 절대 못 만들 거야. 와그작, 감자 칩을 씹은 패파가 말했다. 호영은 공감한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오랜만에 크리스마스다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둘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툭툭 말을 시작했다.
트리는 창가에다 둘 거지? 응. 나 저거 빨간색 티비 위에 두르고 싶어. 집에 테이프 있나? 응. 그래. 그걸로 붙이지 뭐. 응. 루돌프는? 아, 랜턴 건전지 안 샀다. 안 집어넣었어? ..응. 바보야. ...패파 너가 챙기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ㅡ..아냐. 내일 내가 퇴근할 때 사올게. 킥킥. 그거 샀어. 진짜? 응. 계산할 때 옆에 있어서 집어넣었어. 저기 있잖아. 어디? 아. 그러네.
그렇게 대화가 한창 이어질 때쯤 간식을 다 해치운 둘은 나란히 일어나 손을 씻고 왔다. 간식 접시를 치우고 트리를 꾸미려고 창가로 밀어놓은 것들을 가져오던 호영의 시야로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눈송이들이 들어왔다. 패파. 응. 눈 와. ..눈? 응. 패파는 창밖으로 보이는 눈송이를 보며 호영의 옆으로 갔다. 나 올해 처음 보는 눈이야. 툭 던져진 패파의 목소리에 패파를 쳐다본 호영이 씩 웃었다. 그럼 나는 패파랑 처음 보는 올해의 첫 눈. 패파는 눈살을 둥글게 휘어 웃고 있는 호영을 마주한 채 웃었다. 귀엽기는. 손을 잡아오는 호영과 같이 동화처럼 내리는 올해의 첫눈을 보았다. 내일 아침 되면 출근길에 방해만 될 눈이지만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을 만큼 예쁜 풍경이다.
호영아.
응.
내년 크리스마스는 같은 집에서 보내자.
....어?
패파는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아무런 말을 했다. 동그랗게 뜨인 호영의 눈을 보며 씩 웃은 패파는 다시 한 번 인사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오랜만에 맞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포근함을 더했다. 익숙한 그림자가 포개어지는 창문에도 작은 눈 알갱이들이 쌓이는 겨울은 아늑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고 있었다.
메이플 갓 헤테로컾 호영패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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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모두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진심으로 바라요 ♡0♡